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청년기 === 당대 원로원 안팎에서 최고의 명사이자 지식인으로 유명한 대정치인인 까닭에 귀족 가문 태생일 것 같지만 [[기사계급]] 태생의 신참자(노부스 호모)다. 고향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태어난 라티움 지방의 아르피눔 출신인데, 이 도시는 로마에게 오래 전 복속된 라틴인 마을임에도 수백년 동안 투표권 없는 라틴시민권만 부여됐다가 기원전 188년에서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로마시민권을 완벽히 부여받은 동네였다. 동향인 마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키케로 역시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르피눔 옆의 작은 마을 유지 정도였던 마리우스와 달리 키케로 일가는 아르피눔 최고의 재력을 가진 부유한 기사계급(equites)인데다, 로마 사회 안에서는 이미 상류층이었다. 키케로의 부친은 로마 안에 굵직굵직한 정치인, 지식인들과 친분이 있고 인맥도 넓게 형성한 사람인데다 아르피눔 지역 정치인이자 유지이기도 했다. 키케로의 편지에서 그의 동생 퀸투스 키케로가 증언하듯 모친은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검소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키케로 형제의 증언을 통해 추정컨대 그의 외가 역시 친가 못지 않은 재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키케로는 로마 최상류층 수준의 재력을 갖춘 기사계급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로마 귀족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휼륭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학생이었을 때는 누구나 예상하듯 매우 총명한 학생이었고, 대개의 최상류층 자제들처럼 일찍부터 로마 사회에서 변호사, 웅변가 등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학문(수사학, 그리스어, 라틴어, 철학 등)을 두루 배웠다.[* 키케로는 훗날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뛰어난 라틴어, 그리스어 작문 실력과 상호번역 저술에도 유능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수재로 유명했지만, 키케로는 자기 대에 로마 정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신참자라는 출신 성분으로 인해 또래의 유망한 귀족 청년보다 정계 진출 및 출세에는 여러 애로사항을 겪었다. 휼륭한 변호사이자 지식인인 후광 때문에 군대와는 무관해보이지만, 키케로 역시 동맹시 전쟁 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휘하에서 복무했다. 스트라보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마 이때 동갑내기인 폼페이우스와 처음 만났을 것이다. 이어 술라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것으로 보이나 곧 군생활을 그만두고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80년, 아직 신출내기 변호사일 때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 살해 혐의를 변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술라]]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잠시 변호사 활동을 접고 아테네, 로도스 등지로 가 당대 최고의 학자들 밑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이는 술라로부터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술라는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면 거의 무조건 사망이었다.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조치에 반대하다가 죽을 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